엄마를 부탁해_신경숙/ 지워져만 가는 삶이 아니라

나는 작품성을 이야기할 만큼 그녀의 작품을 많이 읽지도 문학적으로 공부를 많이 한 편이 아니다. 그렇기에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에 대해 문학계가 스스로 자정작용을 해낼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선 비판적이나 그녀 스스로 표절 여부를 인정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그녀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어온 독자들에겐 일종의 배신감이나 실망감이 들 테지만, 표절 여부는 철저히 진실성의 측면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문자답에서 나와야 하기에 그녀의 함구 혹은 애매한 발언은 작가의 양심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또한 즐겨 읽는 창비라는 출판사에서 그녀의 표절 시비에 대해 보여준 행태는 정말 실망적이다. 우리나라 문학계의 큰 축이 되는 창작과 비평이라는 출판사가 보여준 발빠른 대처와 말을 바꾸는 번복적인 행태는 실망적이다 못해 씁쓸했다. 팔은 안으로 굽었고, 우리나라 소위 메이저에 속하는 자본력을 갖추고 이름 난 작가들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모습은 문학계의 썪은 그늘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들도 진보를 외치고 있지만, 그들이 가진 문학의 권력은 실로 크고 견고했다. 사과문을 내고 번복 성명문을 내었지만, 비판 여론이 들끓자 바로 말을 바꾸는 모습은 우리 문학계가 겨우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독자로서 어쩌면 이번 사건은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한 경계, 자가비판력이 상실된 수직관계의 문학구조에서 그것의 진실여부를 떠나 독자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테다. 말이 길어졌다. 표절 논란이 있기 전에 신경숙 작가의 책을 읽었고 나또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지워져만 가는 삶이 아니라 299p_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다 파먹힌 몸으로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마늘을 까고 그 마늘로 김치를 담가 내게 부칠 것이다. ​나는 문학수업을 들으며 다양한 연배의 사람들과 만난다. 오랜 시간 이어져온 문학수업이기에 머리 희끗한 언니들부터 내 엄마뻘인 50~60대의 언니들도 수업을 듣는다. 내가 주로 언니라 칭하는 그녀들은 세계2차대전부터 6.25를 겪은 사람도 있고, 산업화를 겪으며 중학교만 마친 채 생활전선에 나서야만 했던 사람도 있다. 한 여자에서 엄마로, 지금껏 엄마의 자리에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녀들이 문학수업을 찾은 이유는 '자신을 쓰고 싶어서'라는 이유였다. 가슴에 멍울진 삶의 무거움들, 엄마라는 이유로 스스로가 희생하며 자신을 지워나갔던 삶의 시간들을 '글'로 만나며 마음을 치유하고, 삶의 에너지를 얻는 듯이 보였다. 언니들과 사담을 나눌 때도 주로 자식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신'이 부재한 그들의 '자식'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때론 걱정과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 또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녀로 이어진 자녀 이야기에 고개를 크게 흔들 거나 때론 묻기도 했다. 자식의 이야기를 다 쏟아낸 후에야 그들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오곤 했다. 한 여자, 다시 엄마의 자리로 살아오면서 자신을 품을 방보다는 주변인을 위한 방이 더 크고 넓어 보였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나서야 검버섯이 올라온 손을 이고는 자신을 이야기하기 위해 교실을 찾는다. 또는 60세가 되어서야 그제야 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며 아직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과한 욕심으로 이 수업을 찾았노라고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 내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그녀들의 삶을 어찌 다 이해할까. 나 또한 아이를 낳고 그제야 부모를, 엄마를 조금이나마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그리 살지 않겠다고, 메데이아처럼 "고통만 안겨줄 뿐인 행복한 생활과 마음을 갉아먹는 부는 내게 필요없다."고 장담하며 한 여자의 삶을 이어가리라 했지만, 결국 나도 엄마의 자리에 들어서고나니 그것이 '파먹힌 몸'을 이끌고도라도 희미하게 웃을 수 있음을 숙명처럼 알게 되는 것이다. 새벽녘 젖을 찾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나를 보니 무릎 나온 바지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는 그렇게 아이 입속으로 꿀꺽이며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웃고 있었다. 할머니의 젖은 허리까지 내려와 있고, 자신의 엄마 젖은 배꼽까지 내려와 있다는 친구의 말에 우리는 이제야 허리가 꺾이도록 웃어내었다. 대중목욕탕 속에 할머니의 젖가슴은 왜 자꾸만 아래로 향해 있는지 자식 몇을 낳으며 끝없이 젖을 먹여야 했던 어미의 숙명이었으리라 싶었다. 수백개의 뼈가 들려 내 몸의 작고 어두운 동굴에서 머리를 비집고 나와 이 험한 세상의 발을 들인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무한대의 모성애가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들의 삶이 메데이아처럼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지워져만 가는 삶도 아님을 어렴풋하게나마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75p_ 큰솥 가득 밥을 짓고 그 옆의 작은 솥 가득 국을 끓일 수 있음 그거 하느라 힘들단 생각보다는 이거 내 새끼들 입속으로 다 들어가겠구나 싶어 든든했지야. 니들은 지금 상상도 안 될 것이다마는 그르케 양석이 떨어질까봐 노심초사하던 시절이 우리 시절이네. 다들 그러고 살았다. 먹고 사는 일이 젤 중했어. ​ 한 여자, 그리고 어미의 일생에 대하여 책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엄마의 실종과 함께 그제야 가족들은 당연스레 박혀 있으리라 믿었던 엄마의 자리를, 존재를 기억하게 된다. 잊고 살았던 혹은 잊어버렸던 엄마라는 사람의 의미를. 딸과 아들, 때론 남편의 관점을 달리하며 이야기한다. '엄마' 그녀는 그 한몸으로 어찌 그리 많은 것을 감당해왔는지 안다고만 생각했던 엄마라는 존재가 더 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음을 그녀의 부재로 그들 '너'는 알아간다. 27p_ 엄마는 힘이 세다고, 엄마는 무엇이든 거칠 게 없으며 엄마는 이 도시에서 네가 무언가에 좌절을 겪을 때마다 수화기 저편에 있는 존재라고. 80p_ 엄마는 할 수만 있다면 가지나 호박 같은 것을 다리에 매달고라도 왔을 것이다. 273p_ 너는 깨달았다. 전쟁이 지나간 뒤에도 밥을 먹고살 만해진 후에도 엄마의 지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아버지와 밥상 앞에 둘러 앉아 대통령 선거 얘기를 나눌 때도 엄마는 음식을 만들어 내오고 접시를 닦고 행주를 빨아 널었다. ​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신경숙이란 작가가 참 대단하구나 느낀 것은 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쉬이 이어질 수 있는 엄마라는 자리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서글픔들을 어쩌면 그리 잘 끄집어낼까 하는 점이었다. 내가 엄마가 됨으로써 느껴졌던 아이를 낳았을 때의 환희보다는 두려움, 엄마의 자리가 가지는 무게감과 수많은 역할들, 그리고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하여 참 잘 풀어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할 수만 있다면 가지나 호박 같은 것을 다리에 매달고라도 왔을 것이다."라는 말에 나는 얼마나 웃었는지. 우리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였다. 일평생 삼남매를 키우며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된 여인, 비쩍 마른 다리에 희끗한 머리를 이고도 자식들 걱정에 밤잠을 설치곤 하는 엄마. 시어머니를 보면 나는 그렇게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가 부재한 환경에서 할머니가 엄마처럼 느껴지는 나로서는 시엄마의 삶이 때론 서글플 때가 있다. 자신을 내게 '엄마'라고 부르라는 시엄마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일 때가 있지만 한 여자로서 그녀의 삶을 가끔은 토닥이고 때론 꼭 안아주고 싶은 것이다. 집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며 양손에 뭘 그리 넣어 왔는지 계란이 터져 가방 한쪽에서 줄줄 새어가는데도 그것이 아깝다고 주워 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찡할 때가 있다. 손수 주운 알밤을 먹기 편하라고 껍질을 죄다 까서는 팩에 넣어 보내고, 마늘도 잘잘 빠서는 토막내어 냉장고에 넣어주는 시엄마의 모습에서 '할 수만 있다면 가지나 호박 같은 것을 다리에 매달고라도 왔을' 어미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아들을 품은 마음, 자식을 대하는 어미의 숙명적 역할들이 나또한 가슴 깊이 새겨지는 것이다. 임종 전까지도 방에 누워서는 절을 올리는 내게 두 번 접은 반듯한 천원 짜리 지폐 한장을 손에 꼭 쥐어 주었던 우리 할매. 말할 기운도 없어 목석처럼 몸을 방에 기대고 내 손을 쓸어내렸던 두텁고 투박한 주름이 자글한 손. 그런 어미의 감각들이 내 몸속에 체화되어 나도 모르게 그러한 길을 이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73p_ 부엌을 좋아하고 말고가 어딨냐? 해야 하는 일이니까 했던 거지. 내가 부엌에 있어야 니들이 밥도 먹고 학교도 가고 그랬으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믄서 사냐? 272p_ 오빠는 엄마의 일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 죄의식 때문일지 모른다고. 그것이 오히려 엄마의 일생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일 수도 있다고. 275p_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 엄마를 부탁해 ​ 엄마의 자리라는 것은 어쩌면 숙명처럼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는 것 같다. 내 일을 관두고 육아를 도맡아 하며 서툰 부엌일에 발을 동동거리며 서성이다가 때로는 "왜 나만", 이라는 부아가 치밀기도 하지만, 어미의 삶이란 것은 어쩌면 피에타상의 죽은 예수를 어루만지는 마리아의 모습처럼 통렬한 '슬픔과 비탄'마저도 감내하고 버텨내야 할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라면 나 또한 그리할 것이라고. 지극히 한 여자의 삶에 충실했던 메데이아의 삶과 한 엄마의 삶에 희생해왔던 마리아의 삶 둘 중 어느 것 하나 진실되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결국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임을. 한 여자, 그리고 엄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작가, 그녀의 말처럼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달라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새기는 것. 그것만으로도. ​ 281p_ 아들은 죽어서도 위로 받고 있었다. 254p_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들을 들여다 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에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 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팔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도 않네. 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4.7 Star App Store Review!
Cpl.dev***uke
The Communities are great you rarely see anyone get in to an argument :)
king***ing
Love Love LOVE
Download

Select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