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고 슬플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때론 말없기 비 오는 창 밖을 보거나 혼자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모든 변화가 나에겐 백 배쯤 증폭된 종소리처럼 온 귀를 두드렸다. 웅웅거렸다. 그건 모두 이별의 징조였다. 나는 지나치게 솔직한 아이였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화나면 화나고 슬프면 슬프고. 작은 자극에도 취약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나는 혼자 멀리 여행을 가곤 했다. 몸이 떠나든, 마음이 떠나든 당장 다른 누군가 한 공간, 한 관계에 있다는 부담은 피하고 싶었다. 무겁고 버거웠다. 나는 아주 좁은 세계에서 나의 그릇에 녹차를 따랐다. 텁텁함. 그 쓴 맛이 정녕 나의 속성임을, 나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색다른' 사람이었다. 무던하게 웃거나 별일 아니라는 듯 고통을 넘길 줄 알았던 그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묵묵히 곁을 지켰다. 나는 그걸 못 견디고 뾰족한 말을 일갈하다가 이내 후회하고 그에게 돌아갔다. 품에 안겨 미안하다며 눈물을 삼켰다. 그 때마다 그는 잠잠히 웃으며 그랬다. 괜찮아. 사랑하니까. 하지만 나는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 그를 사랑해도 그가 깜빡 나의 부탁을 잊는 일을, 그가 무덤덤하게 나의 아픔을 넘어가는 일이 하나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 때마다 나는 악을 쓰며 외치고 싶었다. 나를 봐, 내 아픔을 봐.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렇게 속으로 우는데. 왜 너는 너의 사랑만 보는 거야.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아. 너를 사랑해도 내가 힘들 때 너를 피하고 싶은 게 나야. 너에게 자꾸 상처를 주는 나잖아. 제발 너의 마음이 아닌 나를 봐. 차마 이런 끔찍한 마음을 꺼내진 못하고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그는 괜찮아졌나보다 생각하며 나를 담담히 안아주었다. 그러면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루가 시작됐다. 나 혼자만 미련하게 너무 많은 걸 기억해버렸다. 나는 화를 낼 권리를 잃고 말았다.  쓸쓸한 반복이 이어지며 언제부턴가 그는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그에게 더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고 난 후였을 것이다. 예전의 남자친구들이 모두 그러했듯 그도 결국 나란 사람을, 그 견딜 수 없는 버거움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이기도, 불안이기도 했다. 그의 침묵으로 인해 나는 간간히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고 그 때마다 나 자신의 우울함에 함몰되어갔다. 천천히 가라앉는 바다 속은 차갑지만 잠잠했다. 뭍에서 두 발로 걸었던 기억을 잊어버린 채 나는 텅 빈 시간, 외로움 속을 유영하며 아가미로 숨을 쉬었다.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의 마음은 아물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가 되어 이런저런 아픈 질문들을 뒤돌아 까먹고 싶었다. 외눈을 깜빡였다. 홀로 방에 누운 밤을 떠다니며 나는 아무 생각도 못했다. 아무 빛도 없기에 어떤 것도 분명히 볼 수 없는 곳에서 나는 나의 상태를, 나의 본질을 발견한 듯 편안했다. 명징한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내가 골몰해온 고민마저도. 그냥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를 견디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다움을 찾은 거 같아 사뭇 기뻤다. 그는 여전히 가끔 생각에 잠기거나 말이 없곤 했다. 일상에 지친 그의 몸은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어둔 숲같은 나의 마음에서조차. 그는 사랑의 끝을 떠올렸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며칠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점점 뜸해지다가 0으로 수렴하는 함수처럼 그는 점점 잦아들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그런 이별을 선택한지 모른다. 예고된 일임에도 나는 다소 답답함을 느꼈다. 이미 헤어짐의 말 이외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왜 끝끝내 헤어지자는 말은 못 하는 것일까. 너무 착한 탓일까. 그동안 힘듦을 참아왔기에 이별의 말마저 참게 된 것일까. 난 차라리 지금의 내 모습을 분명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나의 마음도 분명해질 것 같았다.  시침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밤과 새벽이 잇닿는 그 중간점에서 해는 방향을 틀어 아침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겉옷을 챙기고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의 집까지 다섯 정거장은 가야 하지만 나는 그냥 걸었다. 뚜벅뚜벅. 이별을 늦추자, 혹은 지금의 괴롬을 만끽하자. 나는 한 시간 가까이 땅만 보고 걸으며 그의 얼굴을 생각했다. 잠잠히 미소짓는 표정. 혼자일 때 내가 아닌 그를 떠올리는 건 처음이었다. 가방을 들어주던 손, 기댄 어깨, 주저하는 발등. 그를 울리지 말자. 헤어지잔 말도 내가 하자. 어떤 결단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걸 그가 어려워하고 있다면 내가 더불어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했다, 갑자기 솟아난 용기. 출처를 모르지만 그를 대신해 모질어지는 것이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배려라고 느꼈다. 그의 집 앞에선 흩어져 버릴 줄 알았던 그 다짐이 주저없이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나에게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개였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는 문을 연 후에도 나를 집에 들여줄 생각조차 못했다. 항상 먼저 연락하고, 먼저 보러 찾아오는 건 그의 몫이었으니까. 용기는 그의 것이었으니까. 언질 없이 불쑥 찾아온 잠옷 차림의 내 모습을 보며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막상 뜬금없이 서로를 마주하니 낯선 타인을 마주친 것처럼 어색했다. 문턱이란 금을 그어놓고 우린 안녕이란 인사도 없이 서로의 얼굴만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난 듯 초췌했다. 나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너의 꿈이, 너의 마음이, 너의 사랑이 울고 있니, 그런 마음을 담아서 나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지 않다는 말은 차마 입에 담진 못하고 겨우 겨우 고개를 내저으며 그는 울상이 되었다. 악몽이 되살아난 모양이었다. 우린 왜 시작되었을까. 우리가 이다지도 다른 사람이란 걸 몰랐을리는 없는데 왜 우린 굳이 이 어려운 숙제를 함께 풀자고 매달렸을까. 서로에게 다른 언어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헷갈림을 주는 것.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절차. 참고 버티고 또 견디다가 결국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일. 이미 겪어온 실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었을까. 순간 쏟아지는 물음들이 눈 앞을 스쳐갔다. 너무 많고 빠른 말들은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한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 괴로운 듯 질끈 다문 입술. 나와의 간극을 어떻게든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아니 사랑 없음을 책망하는 지도 모른다. 그는 비어져 나올 눈물을 참으려는지 컴컴한 복도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여전히 문간을 넘지 못하고 서있었다. 나는 잠겨드는 생각을 버리고 슬며시 나의 용기를 보여주기로 했다. 괜찮아. 너를 사랑하니까,라고 말했다. 사귀는 중에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늘 삼갔다. 영원히 서롤 이해하지 못할 우리의 관계에 대한 거짓말같아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싫어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너를 미워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진심이었다. 나의 거치른 고백에 그는 묵묵히 땅만 쳐다봤다. 두 줄기의 비가 내렸다. 혹시나 그가 내 언어를 못 알아들을까봐 자꾸만 괜찮다고, 괜찮다고 되뇌였다. 사랑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괜찮은 것도, 괜찮지 않은 것도, 만나고 헤어짐도 모두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그 자체가 사랑일 뿐이었다. 들썩이는 그의 온 몸을 향해 나는 한 걸음만 내딛으면 됐다. 나는 문턱을 넘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보다 훨씬 커다란 그의 품을 안고선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소년처럼 우는 소년. 모르겠다고, 모르겠다고 흐느끼는 서투름. 그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을 모든 순간들을 훑어내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진 나는 그를 다독이며 손으로, 나의 체온과 작은 품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미워해도 된다고.  당장 내일 아침 우리가 헤어져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너무 길고 어두울테니, 너무 막막할테니 오늘은 잠시나마 같이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정이 넘어 시침은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물고기들이 어둠 속에서 춤을 췄다. 태양은 눈치를 보며 자전을 머뭇거렸고 우린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 모르겠어, 모르겠어, 이 말만 아프게 되새겼다. 비가 오려는지 안개가 자욱해진 공기 중으로 두 줄기의 입김이 흩어졌다. 오늘 밤만은 괜찮아보자는 마음으로 나는, 그의 품에서 함께 악몽을 꿨다. 모르겠다. 어쩌면 괜찮아질지도 모를 일이라면  오늘은 이대로,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2014.11.24 #쮼

잉여, 평범, 가난이 장래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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