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물숨, 같은 것

19살. 친구가 죽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가 백혈병으로 아파했다는 얘길 처음 들었다. 나는 그 애가 자퇴를 한 후에도 가끔 연락하며 친하게 지냈었다. "나. 내년에 복학할 거 같아."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 친구는 한 가닥 희망을 말하고 있었다. 당시 핸드폰이 없었던 나는 친구에게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 그저 가끔 거는 전화, 보내는 문자에서 그 친구가 아픔을 나름대로 견디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시 죽음을 알지 못했던 어린 나이의 나는 '아프다'와 '죽다'를 연결짓지 못했다. 일상 속으로, 나의 바쁨 속으로 그렇게 분주히, 무심하게 젖어들던 나였다. 그건 분명 '기만'이었다. 그 친구와 의사가 되자고 했던 약속을 장례식장에서 다시 새기게 됐다. 친구의 어머니는 내 발목을 붙잡고 울었다. 이미 허물어진 담벼락에 무슨 말을 새길 수 있으랴. 나는 의대에 가는 길이 마치 내 사명이라도 되는 마냥 미친 듯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이 나의 무심함에 대한 죄의식, 거기서 비롯된 열심인 줄 모른 채였다. 이 또한 자기기만의 하나였을까 싶다. 지방대 의대 합격소식과 서울대 합격소식을 접하고 나서 나는 의대에 갈 결심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내 결단을 가로막으셨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서울대에 가기를 좀 더 희망하셨던 것 같다. 잠깐의 실랑이가 오고깄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당신 뜻대로 해드릴게요." 스스로를 꺾었다. 이 때부터였을까. 내가 애쓴다고 해서 내 뜻대로 되진 않는다는 무기력을 학습해버렸다. 나는 폭우가 지난 후 거적데기가 된 난파선처럼 위태로이 입학식에 참여했다. 모두들 웃고 있었다. 나도 너무 행복해 철철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 달만에 휴학을 결심했다. 자퇴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머니께서 간곡히 말리시기에 휴학을 하고 의대 반수를 준비했다. 아침 8시에 도서관에 가서 한 손에 빵을 들고 오후 5시까지 일어니지 않았다. 그 후엔 과외를 하고 집에 들어와 죽은 듯이 잠들고 다시 도서관. 그 시절처럼 공부하라면 진저리가 날 정도로, 공부의 발등에라도 간곡히 매달리는 내가 무서웠다. 하지만 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기리는 일은 그만큼의 삶의 무게를 내 지게에 짊어지는 일이었다. 무겁고, 지독히 쓰라렸다. 하지만 반수생활도 3개월만에 끝이 났다. 아픈 아버지를 간호하던 어머니마저 우울증에 걸려 친정으로 가버리셨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날 당장 공부를 그만두고 알바를 시작했다.  제품을 포장하고 매장을 관리하면서 정말 좋았던 점은, 내 상황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몰입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남은 가족들과 호올로 집을 지키며 오직 돈 버는 일에만, 거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지방대 의대를 가지 않은 선택을 다행으로 여기게 됐다. 의대를 반대하셨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기때문이다. 잿빛으로 가득하던 스무살이 지나가고 다시 교정을 밟게 됐을 때, 더 이상 세상은 이전의 내가 보던 색이 아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무인도처럼 외로워졌고, 하지만 그 외로움이 괴로움보다 나은 일이라고 느꼈다. 상황에 대해 학습된 무기력이 날 에워쌌고 나는 공부로부터 등을 돌린 채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여행도 다니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며 내게 익숙해져버린 그 무기력을 덜어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게 결국 하나 하나에 무기력을 겪는, 그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하는 일련의 발버둥으로 이어졌다. 노력해서 무엇하랴, 버텨서 무엇하랴. 나는 내가 나에게 심어놓은 쓴뿌리에 침잠하여 점차 모든 감정을 느껴버린, 모든 마음을 소모해버린 종이인형으로 퇴보해갔다. 아니, 어쩌면 진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몇 년이 더 흘렀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변명하는 일을 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격지심과 실패의 경험에 함몰돼 내가 바꿀 수 있는 가능성까지 내 손으로 버리고 있는 나를, 나라도 포기하지 않고 잡아줘야겠다고 느꼈다. 바다 깊은 곳에 넘실거리던 내 육체가 다시금 수면으로 찬찬히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의 시작은 짧은 생각, 더 이상 나를 버려두지 말자는 마음으로부터였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해 무엇을 예비해야할까. 우선, 오래도록 잠겨있던 슬픔과 무력감의 심해에서 벗어날 때 너무 섣불리 헤엄쳐나오지 않는 진득함이 필요하다. 괜찮다는 말의 폭력을 우린 익히 알고 있기에. 힘들 땐 힘이 드는 대로 조금은 가라앉는 마음을 허락하면서. 벼랑 끝에 서있는 나의 심신을 나까지 몰아세워 떨어트리지 않는 넉넉함이 필요할 것이다. 비록 느리더라도 나의 속도로 차차 깊어지고 넓어질 마음을 위해 분주함과 조급함을 경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섣불리 숨을 들리쉬어 물에게 숨을 빼앗기지 않도록. 내가 가치를 둔 것들을 지키기위한 노력 , 그것이 지치지 않도록 바꿀 수 있는 여지와 바꿀 수 없는 처지를 구분하는 지혜 또한 절실히 필요해졌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지키려는 의지가 중요해지는데 그동안 나는 무책임하게 사랑하고, 기대를 저버리는 현상들 앞에서 쉬이 내 마음을 접어버렸다. 그래, 우선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과 그에 필요한 에너지도 조금씩 쌓아가야겠다. 기온차만큼 감정차가 널을 뛰는 계절이란 말처럼, 사실 이 모든 다짐이 늘상 가능하리라 보진 않는다. 하지만 가끔 주저앉아 멈추는 한이 있어도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 내가 나를 믿고 나를 붙잡아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일련의 사건과 감정을 겪으며 깨달았다. 나는 변할 것이고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의 세상사임을 이미 알지만, 그래도 내가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일엔, 내가 기꺼이 지켜야할 가치에 대해선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갖고 싶어졌다. 아니, 갈대처럼 흔들리더라도 바람에 결코 꺾일 수 없는 자존으로 내게 허락된 인생을 마음껏, 내 마음껏 살아보고 싶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2014년의 가을은 맑다. 나를 휘두르는 것이 많아지는 것, 내가 여전히 휩쓸리고 있다는 것. 그 모든 생의 감각을 사랑하며 나는 오늘도 시험을 치고 사람을 만나고 나의 할 일을 해나간다. 나를 감히 흔들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다시금 생겨났다. 나 또한 그것의 무게를 진중히 버텨보려 란한다. 가끔 소나기 내려도 비 피할 곳 어딘가만 있다면 나는 그대로, 꽤 괜찮은 세월의 더께를 내 어깨 위에 두고 싶은 심정이다.  다들 올해도 무사하길 기도해본다. 2014년 가을 언저리에서 #쮼

잉여, 평범, 가난이 장래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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